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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禪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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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탁발화-末後구

    Name

  무봉   [muni@urbuddha.net]
원문1:하루는 공양이 늦어지자 덕산 노장께서 전처럼 발우를 들고 법당으로 가는 것이었다.
1. 本文: 德山一日에 飯遲어늘 自托鉢至法堂上이러니

이 첫 마디 법문의 요지를 보자:

밥이 늦어지자 문득 나서니, 이름도 훌륭하신 덕산 노장님이 평생 비구로 살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밥 얻어 먹고 배불리는 법도를 알았다. 허나 알수록 그 허물도 크니 발우 그릇을 평생 지녀 담고 닦기를 천만번이라도 오늘의 배고픔을 달래지 못하였느니라.


上方益이 여기에 대하여 頌하기를;

兀兀低頭托鉢歸 맥 없이 고개 떨구곤 발우든채 되돌아 가니
傍觀爭免笑嘻嘻 곁의 구경꾼들이 피죽거리며 웃는 소리 피할 길 있으랴?
早知不要鳴鐘鼓 일찌기 북과 종 울릴 일 없는 줄 알았더라면
一等教伊且忍饑 시장하더라도 참으심이 제일 뛰어날 것을.

이르니, 북 치고 종 울릴 일 없는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경산[徑山]이 "독 바른 북이라 한 번 치면 다 죽는다" 하였으니 그 까닭은 다시 무엇 때문이겠는가?
시장하더라도 참으시라니 수저에 입 대었다간 餓死를 면치 못할 뿐더러 당신의 몸조차 보전하지 못하는 毒飯이 되고 말았구나!


원문2: 설봉이 이를 보고 이르기를: 저 노장님이 종도 치지 않았고 북도 아직 울지 아니하였거늘 발우는 들고 어디로 가시는 겝니까? 물었다.
2. 본문: 雪峰見云 這老漢이 鐘未鳴鼓未響이어늘 托鉢向什麽處去뇨


이 둘째 구절은 매우 심상치 않으니, 설봉이 알면서 물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모르고 한 질문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모두 설봉을 시기 질투하거나 욕보이는 소리이니 조사의 지위에서는 맹서코 허튼 소리로 승부하는 법이 없느니라. 허면 그 어디가 덕산의 제자 설봉의 見處인고?

연극이나 遊戱라 이를지면 뉘 있어 琢磨할 것이며 출가하여 목숨바쳐 정진할 것이냐?
요즈음 무리이 좀 공부를 이루었다 싶으면 따로 산에 住持하고 앉아 하찮은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려 들거나 토굴에 앉아 유유자족하며 도둑질하기 십상이거늘 설봉은 이미 공부를 이루고서도 도리어 공양주를 살며 스승 밑에서 탁마와 거량을 쉴 새 없이 행하니 가히 조사로다. 이 어찌 무량한 공덕이 아니며 신심의 본보기가 아니랴?

* 大覺璉이 이를 위하여 頌하기를,

魚鼓未鳴何處去 목어도 묵탁도 치지 않았거늘 어데로 가십니까? 물으매
一歸方丈便休休 한바탕 방장으로 돌아가니 문득 쉼도 쉬어 버렸네.
荼毘後品難陳敍 다비를 마친 뒤의 일은 말로 다 서술하기 어려우니
泣盡人天不擧頭 눈물이 빠지도록 흠씬 울어도 人天이 고개를 들지 않으리라.


문제는 덕산 노장과 제자 설봉의 알고 모름이 아니다. 뒤의 암두와 더불어 세 父子의 法路가 다 다르니 이를 간파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스승이 제자의 들러리 서는 일도 없거니와 제자가 스승을 놀리는 일도 없는 법이다. 덕산의 허물구를 말하기 전에 부디 살펴 설봉의 견처가 무엇인고 물어보라!


竹庵珪가 頌하기를,

鐘未鳴 鼓未響 종도 치지 않았고 북도 채 울지 않았다 이르니
依前托鉢歸方丈 예전처럼 탁발하고서 방장으로 들어가 버렸네.
德山不會雪峰問 덕산도 설봉의 물음을 알지 못하였거늘
嵓頭密意誰相亮 암두가 이르는 密意를 뉘 있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냐?

只得三年也大奇 다만 삼년 동안 뿐이라 일렀으니 크게 기특한 일이니
留與諸方作榜樣 제방에 남겨두어 귀감이 되게하라!


덕산 노장이 허물을 마다 않고 쉬어 들어가는 意旨는 무엇이며, 덕산도 모르는 일이 무엇이며 설봉이 스스로 노장께 여쭙지 않고 암두로 하여금 密意라 하여 따지도록 내버려 둔 까닭은 무엇이든가? 人天도 가늠하지 못하며 스스로 제기한 암두와 설봉이 귓 속으로만 일러 破說치 못하는 저 글귀는 무엇인고?


天童覺이 頌하되,

未後句 會也無 저 말후구를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하였으니
德山父子大含胡 덕산은 부자 간에 입 속으로만 얼버무렸구나.
坐中亦有江南客 좌중에는 분명 강남 손님도 있을 터인 즉
莫向人前唱鷓鴣 저들 앞에서 자고[鷓鴣] 타령일랑하지 말거라.


이 三父子만이 아는 노랫 말은 무엇일까?

性月 스님과 惠菴스님께서는 돌아간 것이 허물이요, 차라리 그냥 내처 가더라도 나무랄 릴 없겠으나, "종도 치지 아니하였고 북도 울지 아니하는 곳으로 가노라" 대답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시었으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 말과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지 않았다."고 이른 前言이 가히 예리한 칼을 숨긴 것이라, 이미 내쳐 가지도, 되돌아 가시더라도 밥 얻어 먹지 못할 줄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허물을 알아 암두에게만 조용히 이른 것이다.
따라서 나 같으면,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지 않았다."고 덕산에게 誥한 데 대하여는

"敵過後張弓이라," 즉, 도적이 지나간 뒤에 살을 당긴 것이라 이를 것이요,

저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물음에 대하여, "古佛過去久라, 옛 부처가 오래 전에 지나갔으니 내 다만 그리 가노라." 고 대답하였으리라.

이렇게만 대답하였더라도 설봉은 몸 둘 곳이 마땅치 아니하여 필경 "스님 곧 공양 올리겠나이다." 라고 엎드려 사죄하였으리라. 비록 그러허나, "물이 얕으면 번잡스런 소리가 그칠 줄을 모른다."하리니 이에,


원문3: 노장은 문득 방장으로 되돌아 갔다:
3.본문: 師便迴라,

위에서, 竹庵珪가 두번째 원문에 대하여 頌하기를,

鐘未鳴鼓未響 종도 치지 않았고 북도 채 울지 않았다 이르니
依前托鉢歸方丈 예전처럼 탁발하고서 방장으로 들어가 버렸네.

하였으니, 공양 마치고 당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평생하든 옛 모습 그대로라,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말도 한 마디 이르지 못하고 돌아가니 밥도 먹지 못하고 법을 이르지도 못하였다" 이르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이 便廻하는 도리야 말로 우리 宗門의 귀감이라, 문득 還地本處하는 의지를 천명한 즉 一大事를 指示하여 마침이라" 칭찬하기도 하였다.

왜 덕산 노장님은 문득 방장으로 되돌아 가신 것이며 저 설봉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아니하신 것일까?

介庵朋이 頌하기를;

鼎油穿市釰隨行 기름바른 솥을 지고 시장통을 지나는데 검객이 뒤쫓나니
命似懸絲得不爭 목숨이 실낱 같아 다툴 수도 없음이로다.
耳內不聞歌樂響 귓 속에 노랫가락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到頭無犯獲全生 애초에 범한 바 없었기에 목숨을 보전하였도다.


일러보자면 이렇다:
먹었다고 대답하면 굶어 죽을 판세요, 안 먹었다고 말하면 애비의 체면을 잃는다.
밥먹으러 간다거나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라면 더더욱 멀어지니 할 말이 없도다.
할 말이 없음이여! 가만히 앉아 있으니 가난한 놈이 되레 제 밥과 떡을 가져다 준다.


이 도리는 바로 다음의 설봉과 암두의 대화에 잘 나타나 있거니와 저 便廻의 意旨를 묻거든 나 같으면;

再犯不容이라 하리라. 즉, 두 번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까닭이라 하겠다.

갈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이키니
멀고 가까움이 없고 오고 감에 옳고 그름이 없다.
한 번 떠난 길 작은 부름 소리에 되돌림을 마다 않으니
자비가 넘치는 애비의 老婆[바]心이 간절하다네.



원문 4: 설봉이 이 얘기를 암두에게 이르니 암두가 이르기를 덕산 노장님이 末後句를 알지 못하신다 하였다.

4. 본문: 峯擧似巖頭하니 頭云 大小德山不會未後句니라.

다시 위에서, 竹庵珪가 이어 頌하기를,

德山不會雪峰問 덕산도 설봉의 물음을 알지 못하였거늘
嵓頭密意誰相亮 암두가 이르는 密意를 뉘 있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냐?

하였고,

海印信이 덧붙여 頌하기를;

垂絲本爲釣鼇頭 낚시를 드리운 뜻이야 자라에 있거니와
不遇鯤鯨便卻收 고래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문득 거두어버렸네.
剛被傍人布罝網 주변에 있든 사람들 구태어 그물치고서
撈蝦摝蜆鬧啾啾 게와 조개 건지며 조잘조잘 시끄러이 떠드누나.

하였으니 "고래를 만나지 못하였다" 함은 설봉의 질문에 대한 덕산의 見處를 일컬어 말함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덕산의 옳고 그름은 그만 두고라도, 설봉과 암두를 두고 누가 더 옳으냐를 따짐"이 "게와 조개 건지며 조잘대는 시끄러운 무리"인 것이다.

天童覺이 頌하되,

坐中亦有江南客 좌중에는 분명코 강남에서 온 손님도 있을 터인즉
莫向人前唱鷓鴣 저들 앞에서 자고[鷓鴣] 타령일랑하지 말라.

하였으니, 人天의 福田이 따로 있다. 嵓頭가 이를 末後句라 지어 부르니 덕산이 이르지 않은 것을 암두는 왜 일렀는지 그 意旨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암두는 말후구라는 말을 하였는가? 그리고 저 덕산 노장을 '외눈박힌 龍' 에 비유한 것이나 '잇빨 없는 범[無齒大蟲]'이라 비유한 것에 맞추어 그의 便廻를 왜 말후의 한마디로 보아 대비시켜 이르는 것일까? 이는 매우 중요한 법문이다. 덕산이 모르는 설봉의 '質問'과 암두가 붙인 '말후구'라는 두 가지는 바로 덕산의 말 없는 便廻의 骨子이기 때문이다. 혜암 노장님은 眼不自見耳不自聞이라 하시었으나, 뒤에 설두가 지적하였듯이 뜻을 알고는 있으나 吐하지 못하였으니 含情未吐라, 무봉 같으면,


千 五百 善知識이 話頭也 不識이니라.
즉, 천 오백 선지식이 화두가 무엇인지 모르느니라. 하리라.



원문 5: 이 소리를 들은 스님께서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렀는데 그가 다다르자 방장스님이
묻기를, "네가 나를 긍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하였다.
5. 본문: 師聞擧令侍者喚嵓頭至方丈問 汝不肯老僧耶


설봉의 물음에 아무 대답 않고 방장으로 돌아들어간 노장의 행리처를 물은 것이다. 만일 덕산에게 아무 생각이 없었거나 암두를 시자시켜 부를 때까지도 당신의 깊은 의중과 허물을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대가 바로 살불살조하는 것이니라.

雪竇寧이 頌하기를;

渠儂慣弄勿絃琴 저 노장은 줄 없는 거문고 타고 노는 버릇이 있었으니
韵出靑霄旨趣深 청소곡을 뜯을 제 깊은 운취가 절로 나온다.
多少傍邊人著耳 수 많은 곁의 사람들 귀를 모아 들어보지만
誰知得失本無心 뉘 있어 얻고 잃음이 본래 무심한 줄을 알 것인가?

어찌하여 덕산은 설봉 당사자를 부르지 않고 암두의 빈 말을 좇아 간 것일까? "그대가 나를 수긍할 수 없다는 말인가?"하고 되 물어주니 암두가 그만 심중에 담긴 무거운 소리 그만 들켜 귀속말로 어물대는구나!


徑山杲가 頌하기를;

一檛塗毒聞皆喪 독 바른 북이라 한번 친 즉 듣는 이는 다 죽나니
身在其中摠不知 몸은 그 안에 있되 전혀 알지 못하누나.
八十翁翁入場厔 여든이나 먹은 할배가 과거장으로 들어감은
眞誠不是小兒嬉 그 정성 지극하여 아이들 장난이 아니라네.

혹자가 이르되, "설봉과 암두의 연극이라" 하니 들어간 문은 같으나 살아 나올 문을 없앤 격이로다. 각고의 노력을 기우려 탁마하고 거량하므로써 그가 조사의 반열에 든 것이니, 자, 그 탁마하는 모습을 보라! 나 같으면 차라리,

無時節 宣鑑 門 內에는
鷓鴣啼處에 百花香이니라,

시도 때도 없는 밝은 거울 속 같은 집 안에는
자고새 지저귀는 곳에 백가지 꽃 향기가 풍겨오누나. 하리라.


원문 6: 이에 암두가 그 뜻을 몰래 말씀드리니
6.본문: 頭遂密鷄其意라:


雪竇顯擧此話 連擧明招代德山云 咄咄沒去處沒去處
師云曾聞說箇獨眼龍元來只有一隻眼殊不知德山是个無齒大蟲
若不是嵓頭識破爭得明日與昨日不同諸人
要會末後句麽
只許老胡知不許老胡會

설두현이 이 화두를 거량할 제, 이어서 明招가 덕산을 대신하여 "애닲다 애닲다, 갈 곳이 없구나 갈 곳이 없구나"하였으니 "외눈박이 용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래 한쪽 눈만 있는 줄은 알았으니 덕산이 잇빨 없는 범인 줄은 전혀 알지 못하였구나. 만일 저 때 암두가 알아내지 못하였더라면 내일과 어제가 不同[다음날 덕산의 어투가 달라진 것]인 줄을 알았겠는가? 저 말후구를 알고자하는가? 저 노장으로하여금 짐작하게는 내버려 둘 수 있으려니와 해득하여 아는 일은 허락지 못하는 것이로다." 하였다.


圜悟勤이 拈하되,

此个公案叢林解會極多 然小有的礭透得者
有以謂眞有此句有以謂父子唱和實無此句 有以謂此句須密傳授
不免只是話會增長機路去本分甚遠
所以道醍醐上味爲世所珍遇此等人飜成毒藥

이 공안을 총림에서 해석하며 안다는 이는 많거니와 확실하게 투득한 이는 아주 드무니라. "참으로 그런 귀절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부자 간에 주고 받은 말이니 실제로 그런 귀절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이러한 귀절은 비밀스레 전해져야한다"고도 말하느니라.
허나, 이런 말들은 모두 재치와 기지를 다투는 말일 뿐 본분과 사뭇 거리가 있는 말들이니
그리하요 "제호의 맛은 세상이 다 소중하게 여기는 바이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 독약으로 바뀌느니라."한 것이다.

허나, 여기 大覺璉의 송을 보면;

一歸方丈便休休 한바탕 방장으로 돌아가니 문득 쉼도 쉬어 버렸네.

하였으니, 정작 재주 많은 자식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죽을 길에 들어선 아들들을 구출한 것은 뒷 방에서 쉬고 있는 늙은 애비로다.

大潙哲이 拈하기를;

嵓頭大似高崖石裂直得百里走獸潛蹤若非德山度量深明爭得昨日與今日不同

암두는 꼭 높은 벼랑 끝에서 돌맹이가 떨어지니 날짐승들이 백리길을 달려 종적을 감춘 듯하다. 덕산이 깊고 밝게 헤아려주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떻게 어제와 오늘의 다름을 얻었겠는가?

자식이 똑똑하니 애비의 기쁨이 한 없이 큰 것이로다.

허나, 설봉은 유독 암두에게 일러 말후구라는 말로 노장의 심기를 건드리고 덕산도 유독 설봉은 제쳐두고 암두를 불러 따지니 둘의 허물을 지나칠 수가 없다. 이에,

翠嵓眞이 拈하되;

德山嵓頭一狀領過雪峯一千五百人善知識地在라 한 것이다:

즉, "덕산과 암두는 한조각 영장으로 불려가 같은 벌을 받으려니와 정작 설봉이 선지식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른 것이다.

종치고 북 울리는 일로부터 승당에 머물러 밥을 기다리는 일 等이 다 杜口無言하고 빙그레 웃는 한 衲子의 소관이며, 말재주를 뽑내는 형제와 듬직한 애비조차도 良久하는 禪客을 뛰어넘지 못한다.

心聞賁이 此話를 擧揚하는 자리에서
德山과 嵓頭를 相見할 것까지는 없고 이제 다만 세인의 의심을 풀어주고자 하니
末後句를 알고자 하는가? 하고는 良久하였다가
云하되, 鵲巢樹下라, 즉, "까치의 둥우리는 나무 아래 있느니라."하였다.

그런데 왜 心聞은 덕산과 암두를 상견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을까?
암두가 말후구라는 말을 던진 것이고 덕산이 방장으로 되돌아 간 것을 두고 이름이니
여기에는 소위 말후가가 없다는 말이다.


 혹자가 이르되, 백장이 말 없이 조실 방으로 돌아 들어간 뜻은 알기가 어려우니 가히 조사의 大機가 아니고는 알 수 없다고 평하였고 또, 혜암 스님께서는 이를 질타하시며 이르시되, "말 없이 그만 내처 가는 것이야 모르나 되돌아 간 것은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 밥도 먹지 못하고 설봉의 물음에 답하도 아니하였으니 크게 그르친다."하시었다.

탁발화를 탁마한 두 경우를 여기서 보게 되는데, 저 혹자의 경우는 겁만 먹고 돌아선 것이요, 혜암 스님의 경우 허물은 분명히 보았으되 活路를 간파하시지 못하였다 하겠다. "모른다"는 말은 저 덕산의 경우와 같으니 어찌 팔만 사천 부처와 일체 조사가 동시에 출현하더라도 그르치는 도리인 것이다. 이는 水不離波요 波不離水의 도리이니 덕산이 모르나 암두가 알고 설봉이 말 없이 놓아두매 다음 날 노장의 법문이 달리 들리는 것과 같고 나무 아래에 있는 까치집과 같은 것이다. 일체 불보살이 알 수 없고 일체 선지식이 투득하지 못하는 그 한 마디인 것이다.

말후구가 무엇인가?
나 같으면 "저 最初句에 있다."하리라.


원문 7: 이튿날 사께서 법상에 오르시었는데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7. 본문: 師至明曰上堂與尋常不同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는 말로 말미암아 생긴 오해가 여러가지이니,
첫째, 암두가 말후구를 모른다고 한 말에 대하여 노장이 그 말에 수긍하여 이제 귓속말로 들은 뒤 알아차리고는 기뻐서 법문의 깊이가 더해진 것이라는 경우요;
둘째, 암두와 노장의 뜻이 서로 다르다가 귓속말을 듣자 합일하게 되었다는 경우다.
셋째, 암두와 설봉을 탁마한 덕산의 견처로 보는 경우가 마지막이다.

첫째의 경우, 만일 덕산 노장이 설봉에 의하여 암두의 말후구 얘기가 나왔을 때 아직도 저 제자들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 늦게 암두의 귓속말을 들은 연후에야 겨우 암두의 깊은 뜻을 알았다면 덕산의 눈을 멀게하였을 뿐 아니라 제불조사와 천하 선지식의 눈을 아룰러 다 멀게 만드는 처사이리라.
둘째의 경우, 뜻이 암두와 다르다가 겨우 같아진다는 경우는 말후구라는 암두의 말에 의하여 덕산 노장의 쉬어 되돌아간 意旨가 밝혀지고 그 허물이 들어나는 경우일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덕산 노장이 암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낄 것인가? 말을 아끼는 경우는 스스로 몰라 죽든가 제자를 죽이기 위해서일 터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경우는 오직 덕산의 見處를 일컫는 경우 뿐이다.

무엇이 덕산의 견처를 일컫는 경우인가? 나 같으면 이리 말하리라:

流水聲不見이요 無味中妙味니라
흐르는 물 소리 듣지 못하고 본래 맛이랄 게 없는 중에 참 맛이 있도다.



원문 8:암두가 승당 앞으로 와 손벽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기쁘니 우리 노스님께서 드디어 말후구를 얻으시었구나, 하였다.
8. 본문: 頭到僧堂前撫掌大笑云 且喜得老漢會末後句他


그런데 왜 암두는 손벽을 치며 기뻐하고 크게 웃는 것인가?
破說을 하고 게면쩍어서 인가? 정말로 덕산 노장을 칭찬하는 소리인가?
말후구를 드디어 얻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密庵傑이 頌하기를;

斫卻月中桂 달 속의 계수나무 꺾으니
淸光轉更多 맑은 빛이 더더욱 많아진 것이리라.
狐狸俱屛迹 여우와 삵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師子奮金毛 사자가 황금 털을 뽑내는 것이로다.

하였으니, 비록 설봉과 암두가 각자 뜻을 펴 노장의 허물을 말하나
허물있음을 잘 알고도 施恩을 저버리지 않으니 지극한 자비가 넘치는 법이라
간교로운 지혜와 자리숨겨 바라보는 사냥꾼의 절묘한 솜씨야 비록 기특하지만
용맹스런 사자의 大平原에 누워 쉬는 담대함을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하리라.



원문 9: 저 뒤로는 천하의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리로다.
허나 이것도 단지 삼년 뿐일 것이로다. [과연 삼년 뒤에 사께서 천화하시니라.]
9.본문: 他後天下人不奈何 雖然如此只得三年


無盡居士가 頌하기를;

鼓寂鐘沈捧鉢迴 북 그치고 종 잠잠해지자 바릿대 들고 되돌아 갔으니
嵓頭一拶語如雷 암두의 말 한마디 마치 우뢰와도 같구나;
果然只得三年在 과연 다만 삼년만을 얻어 머물렀으나
莫是遭他授記來 그에게 수기를 받은 것이랄 수는 없겠구나.

암두의 한마디 말후구는 우뢰와도 같아 흠칫 노장의 마음을 건드리기는 하였으되
완전히 허물을 뒤집어 밝혀내지는 못하였으니 또한 암두의 일이로다. 설봉은 이 속내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 노장님 앞에 직접 말씀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설두가 이르기를 앞서 노장의 知는 허락하되 會는 不許한다 하였으니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렇다면 저 삼년은 무엇인가?

혜암 선사께서 이르시되;

오직 암두만이 스스로 일러둔 소리라 하시었으나,
이 뜬금 없는 한마디는 말후구에 대한 自對라 삼년 뒤를 보장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心聞賁이 頌하기를;

懵懂行來又撞頭 뒤뚱뒤뚱 다니다 또 마났으니
不如托鉢且迴休 바릿때 들고 들어가 쉬는 편만 같지 않다.
無端惹起三年話 근거 없는 3년 이란 말만 생겼으니
添得傍人一叚愁 곁의 사람들 한 가닥 근심만 쌓였다.


雲居元이 上堂하여 擧此話하여 云하되;
叵耐嵓頭作亂人家院舍
然雖如是 蚊蝱弄空裏猛風 螻蟻撼於鐵柱
殊不知德山是个無齒大蟲直饒通身是鐵也被一喝
諸人要會末後句麽
雲居爲你說破拈拄杖
云乍可啞卻我口不可瞎卻汝眼

참을성 없는 암두가 남의 집을 어지럽히기만 하였다.
비록 모기와 각다귀가 허공 속의 거센 바람을 희롱한다손 치더라도
개미가 무쇠 기둥을 갉아 먹는 것과 같은 경우이니
덕산이 이빠진 범인 줄은 전혀 몰랐다. 설사 온 몸이 무쇠로 되었더라도
한번 할을 당해야하리라.
모두 말후구를 알고자 하는가? 운거가 설하여 주리라.
주장을 일으켜 세운 뒤 "차라리 나의 입을 잠시 막을지언정 그대들의 눈을
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로다." 하였다.

입을 막아 말을 못하게하는 편이 차라리 옳으니 말하여 보았자 결국
저 암두가 어쩔 수 없이 귓속 말로 떠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암두의 속임수가 아닐
진대 그리고 이미 환히 명명백백 들어난 것이 아닌가?

원오가 이르되, "문득 독약으로 바뀐다"는 말이 바로 그 까닭이다.

나도 저 뼈저린 덕산의 한을 풀고 천하의 사람들을 의혹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마디 이르리라.
덕산은 저 말후구를 알았더라도 내쳐 나아가지 못하고 밥을 얻어 먹지도 못하리로다. 喝[할]

내가 송을 지어 이르되

三聖不知祖師禪하고

佛祖未會這話看이로다

異口仝吟破三界하니

今日無事愧涅槃이로구나.



세 성인도 조사선을 모르고

부처와 조사도 이 화두는 살피지 못한다.

다른 입으로 같은 것을 읊어 삼계를 깨뜨리니

오늘의 일 없음이 열반조차 부끄럽게 하는구나.



三下하고 便休하였다.
 

(Update time : 2005-06-17 오전 10:56:51,   view : 1361)
 Comment
良久棒喝     (2005-06-27 오후 12:23:08)
나도 한 마디 올리리라:

德山은 理致만 알고 事相을 몰랐으며, ?頭는 事相만 알고 理致를 모른 것이로다.
그렇다면 무엇이 雪峰의 고자질인가?
알고 모름이 다 부질 없으니 공양간의 主人은 공양主로다.
무봉     (2009-05-12 오전 7:42:08)
본 글은 상우천고의 항목 '吾度 頌'을 참하여 통찰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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